Memorial story | 김충기 목사님을 기억합니다.
한국교회 대부흥의 주역, 김충기 원로목사의 일생

한국교회의 별 김충기 원로목사님
하나님 품에 안기시다.

시대를 풍미한 한국교회 최고의 부흥사

1970년대 말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은 주로 영적 권능을 가진 소수의 부흥사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중 1960년대부터 준비되고 가장 두각을 나타냈으며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큰 획을 그은 종이 김충기 목사이다. 그는 64년간 ‘오직 하나님 중심, 오직 성서 중심, 오직 성령 중심, 오직 하나님의 은혜 중심’으로 한국교회 부흥운동을 이끌어온 순수한 부흥사, 순수한 목회자였다.
김충기 목사는 1932년 6월 19일 충남 부여에서, 강한 유교적 전통을 물려받은 부친 김사인 씨와 기독교인인 김경자 여사 사이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신앙에 영향을 받은 김충기 목사는, 일제강점기의 엄혹한 시기에도 어려서부터 동아기독교회에 출석하여 강인한 신앙을 키워 나갔다. 6·25전쟁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고 야전병원에서 투병 중에 전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한다.
퇴원 후 신학수업을 시작하면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전 15:10)는 바울의 고백을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고 좌우명으로 삼는다.
1955년 24세의 나이로 충남 서천군 망월침례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고, 3년 후 충남 부여군 세 도면 반조원침례교회로 목회지를 옮긴다. 이곳에서 평생의 반려자인 박인애 사모를 만나 신혼살림을 시작한다. 두 교회에서 좌절을 경험했으나,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하여 1960년 8월에 개최된 계룡산 전국 목회자집회에서 큰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다. 주변에서 미치광이라는 오해와 교단 신학교로부터 핍박을 받았으나, 대전 보문산 겟세마네기도원 집회에 정탐차 온 조효훈 목사가 도리어 은혜를 받고 우호적인 동역자가 된다. 계룡산 집회에서 은혜받은 종들로 구성된 ‘세계기도동지회’에서 김충기 목사는 총무로 봉사했는데, 이 단체는 한국 강단의 수많은 부흥사를 배출하여 1970 년대 부흥의 기수가 되었다.
반조원침례교회의 부흥 소문은 국내외로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교단을 막론하고 부흥사로 초청 받아 매주 한두 번의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그 성과는 웨슬리나 휫필드의 활동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1962년 함열침례교회에 청빙되어 큰 부흥을 이루고 방언의 은사와 능력의 역사가 물 붓 듯 부어졌다. 1967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장로교회의 텃밭인 대구 지역의 대구중앙침례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한다. 당시 침례교는 이단 중의 이단으로 취급받는 불리한 여건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목회에 전념한 결과 기도하는 대로 응답의 역사가 불일 듯 일어나 기존의 인식을 단박에 불식시켰다. 9년간의 사역 후 1975년 12월 서울에서 새로운 사명을 시작한다.

서울 강남에서 침례교단 장자교회의 반석을 놓다.

1976년 2월 1일 오후 3시 강남구 청담동 69-4호 학동빌딩 3층, 김충기 목사는 송재문 장로 등 40여 명의 성도와 함께 서울의 강남 한복판에서 역사적인 강남중앙침례교회 창립예배를 드린다. 당시 한국의 침례교회들은 도심의 변두리 지역에 주로 위치해 있었고, 서울 도심지에는 유일하게 미국 남침례교 한국선교부가 충무로에 서울침례교회를 세워 교단의 선망과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 이런 때에 하나님은 조용히 김충기 목사에게 핵심지 중의 핵심인 강남의 중심에 교회를 세우도록 예비하신 것이다. 또한 그는 칠판설교를 통해 설교의 주요 내용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며 말씀 중심의 목회를 전개했다. 성령의 생수와 기적의 역사가 예배마다 나타나면서 교회는 사도행전적으로 부흥한다.

‘전도와 선교’를 모토로, 개척한 지 2년 9개월 만인 1978년 11월 19일 성전 입당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은 영국 스펄전 목사의 부흥을 훨씬 초월하는 대역사이며, 교회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빠른 성장이었다. 김충기 목사는 양수리의 20만평에 이르는 광대한 땅을 매입하여, 한국교회를 대표할만한 최고·최대의 영적 훈련의 장으로서의 양수리수양관을 세우기에 이른다. 1982년 8월 28일 수양관 기공예배에 이어 1984년 12월 교육관 건축 입당예배를 드림으로써, 강남중앙침례교회는 예배당·교육관·수양관의 3박자를 갖춘 대형교회로 성장했다. 개척 10년 만에 재적 성도 1만 명에 달하여 그 성장 속도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김충기 목사의 영적 지도력은 개교회와 교단뿐 아니라 초교파적인 한국교회 전체로 확산되었다.1988년 3월 침례회보 사장과 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 19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1989년 9월 기독교한국침례회 45대 총회장에 취임하고, 이듬해 8월, 소련 등 100개국이 참석한 제16차 침례교세계대회를 서울에 유치하여 전 세계인이 보는 앞에서 하루에 1만 명을 침례 주는 대역사를 이루어냈다.

1990년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 10만 명이 모인 가운데 ‘민족화합과 통일을 위한 대성회’가 대 회장인 김충기 목사의 인도로 성황리에 치러졌다. 1991년 4월 예수사랑큰잔치에서는 참석자 총 10,586명 중 새 신자가 총 3,650명에 이르고 이중 2,140명이 결신하는 복음전도의 중흥기를 맞았다.

교회학교의 성장도 괄목할 만했다. 1991년 한국기독교기도원 총연합회 공동회장을 연임했고,군선교를 비롯해 국내외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국내 침례교 최대 규모의 교회로 부상한 1996년은창립 20주년을 맞는 해로, 단기 선교사 파송과 다양한 해외교류를 활발히 이어갔다. 강남중앙침례교회의 ‘말씀 중심의 영성신앙’ 전통은 김충기 목사에 이어 2대 피영민 목사, 3대 최병락 담임목사에게로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공개청빙을 선택하여 안정적인 세대교체를 이루어낸 것은 한국교회의 귀감이 되었다.

한국 기독교 전체에 공헌한 부흥운동의 대역사

김충기 목사의 부흥운동은 기독교한국침례회 교단뿐만 아니라 한국 기독교 전체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먼저 김 목사는 한국 침례교 역사에서 동아기독교와 기독교한국침례회를 연결하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했다. 둘째, 타 교파에 의해 이단시되고 배척되었던 침례교의 위상을 크게 드높이고, 침례교의 성서 중심성과 복음성을 크게 홍보함으로써 침례교단이 한국교회의 당당한 중심 교단으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셋째, 김충기 목사의 부흥성회는 교회의 영적, 수적 부흥에서 성령의 역사에 의한 기적과 은사가 꼭 필요한 것임을 한국교회에 깨우쳐주었다. 넷째, 한국 기도원 운동사상 기도원의 위상을 획기적으로 높여주는 데 공헌했다. 마지막으로 김충기 목사는 부흥하는 개교회의 전형적인 모델을 제시했고, 그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교회 개척을 시도하는 모범을 보였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한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초인적인 역사를 이룬 김 목사는 침례교단의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다. 끊임없는 부흥사역과 교회 개척 과정에서도 『칠판설교집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그리는 하나님』을 비롯하여 총 9권의 설교집을 남겼다

김충기 원로목사 이력

1932년충남 부여 출생
1955년 12월목회 시작
1960년부터부흥성회 인도 시작
1976년 2월 1일강남중앙침례교회 개척
2002년까지강남중앙침례교회 담임목사 재임
2019년 12월 25일오후 4시 88세의 일기로 소천

침례신학대학 목회대학원 졸업
미국 애리조나주 그랜드캐니언 대학 명예신학박사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침례대학 명예철학박사(Ph. D)
2001년 5월 침례신학대학교 명예신학박사(Th. D)

침례신학대학교 이사장 역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공동회장 역임
기독교한국침례회 증경총회장
한국기독교기도원총연합회 총회장 역임
사단법인 군복음화후원회 이사 역임
침례신문 이사장 역임
양수리수양관 원로원장
강남중앙침례교회 원로목사

김충기 원로목사 설교집

『방송설교집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 1982, 복음문화사.
『제1집 생명을 아끼시는 하나님』, 1987, 엠마오출판사.
『제2집 우리를 간섭하시는 하나님』, 1988, 요단출판사.
『제3집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 1990, 요단출판사.
『제4집 남겨두신 하나님』, 1991, 엠마오출판사.
『제5집 통치하시는 하나님』, 1992, 엠마오출판사.
『제6집 운행하시는 하나님』, 1996, 백왕기획.
『제7집 절기설교집 일하시는 하나님』, 2001, 백왕기획.
『제8집 칠판설교집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그리는 하나님』,
2003, 도서출판 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