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 담임목사님 칼럼
부족함은 소통을 열어준다
최병락 담임목사
세상에 어떤 사람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 모두 음료수의 이름처럼 2% 부족하게 살아간다.

1997년 한 음료 회사에서 "2% 부족할 때"라는 음료수를 출시했을 때 그 반응은 실로 대단했다. 텔레비전의 광고의 내용도 모두 2% 부족한 사랑과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특별한 맛을 지니고 있지 않음에도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 한 이유는 모두 자기들의 이야기라고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음료수의 맛 자체도 주스라고 하기에는 2% 부족하고, 물이라고 하기에도 2% 부족한 음료수였다. 그런데 그 부족함이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물 마시고 싶은 사람도 찾고, 주스 마시고 싶은 사람도 찾는 음료수가 된 것이다. 부족함은 오히려 사람들의 매력을 끄는 힘이 있다. 사람들과 소통하게 만드는 말할 수 없는 신비가 그 속에 있다. 너무 완벽한 사람은 홀로 잘났을지는 몰라도 주위에 사람이 없다. 하지만, 부족한 2%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땅의 대다수의 2% 부족한 사람들과 소통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2% 부족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이 땅 위에서 살게 하셨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과 어울려서 살아가라고 말이다.

스타벅스에서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일 스타벅스 커피숍에 들린다. 아메리카노 한잔을 시켜놓고 그곳에서 성경을 읽고, 설교를 준비하며, 책을 읽는다. 벌써 10년째 지속하는 습관이다. 그렇다면, 내가 왜 이렇게 스타벅스를 매일 찾게 된 것일까? 이유는 전혀 엉뚱한 데 있다. 목회를 시작할 때 주일날 오후 두 시간만 미국교회를 빌려서 썼기에 목양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설교를 준비하거나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따듯한 침대가 기다리는 집으로는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항상 잠을 깨고 새벽예배를 마치면 곧장 가장 가까운 스타벅스 커피숍으로 달려간 것이다.

처음에는 소음으로 집중이 잘되지 않았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고 오롯이 말씀에 집중할 수있었고, 어느덧 네다섯 시간이 훌쩍 지나 가기 일쑤였다. 목회자가 설교를 준비할 목양실이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 목양실이 없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니라,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목양실의 부재가 나에게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주었고, 푹신한 소파가 기다리는 목양실이 대신 딱딱한 의자가 있는 커피숍에서 보낸 지난 10년의 시간은 가히 말로 다 할 수 없는 소중한 배움의 시간들이었다.

부족함은 새로운 세상으로 길을 열어준다. 부족함은 소통을 열어준다. 목양실이 없어서 스타벅스 커피숍으로 내몰리다시피 간 나는 지난 10년간 수많은 사람과 그곳에서 소통을 했다. 지역교회 미국 목회자, 예수를 믿지 않고 골프에 빠진 백인과 친구가 되었고, 남녀노소 수많은 사람의 친구가 되고,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같은 크리스천을 만나면 기도 제목을 나누고 그 곳에서 함께 기도하기도 했다. 부족함은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밀어내었고, 그곳에서 나는 수많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나에게 목양실이 있었다면, 나의 매력적인 아침 습관이 생기지 못했을 것이다. 있음으로 감사한 것이 아니라, 없음으로 감사할 것이 있다면, 내게는 바로 "목양실"이 그중의 하나이다.

어느 아나운서의 이야기

예전에 한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 세미나의 주 강사는 김은성 KBS 아나운서였다. 이분의 방송국 아나운서 합격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김은성 아나운서는 면접이 있는 날 치명적인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입이 돌아가는 구안와사에 걸린 것이다. 아나운서의 생명이 말하는 것과 표정인데, 얼굴이 한쪽으로 돌아가는 구안와사는 그야말로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고민 끝에 면접을 강행하기로 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세 명의 면접관들이 모두 놀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면접관이 물었다고 한다. “자네는 그 얼굴을 하고 어떻게 아나운서가 되려고 생각을 했나?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해도 아나운서의 생명은 자기 관리인데 자기 관리가 그렇게 소홀해서 얼굴이 돌아가게 했다면, 뉴스를 진행하다가 얼굴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보장을 어떻게 하겠나." 그때, 김은성 지원자는 물러서지 않고 자기의 의견을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지금 일시적으로 얼굴이 돌아갔지만, 이 얼굴은 조금만 지나면 정상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런데 면접관님들도 인생에 어려운 순간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 포기하셨더라면 오늘 이 자리에 있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제가 얼굴이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왔습니다. 얼마나 사명감이 투철했으면 나왔겠습니까. 뽑아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자기의 생각을 나누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김은성 아나운서가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그 순간 면접관 중에 가장 상관인 가운데 앉아있는 사람의 마음속에 잊고 있었던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고 한다. 바로, 자기가 그 방송국에 처음 입사시험을 볼 때 구안와사에 걸렸다. 그러면서 자신이 겪었던 고통과 합격이 되었을 때의 기쁨, 그리고, 그 후 어떤 마음으로 아나운서 직책을 감당했는지가 떠오르면서, 자신의 옛날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면접관은 그 젊은이의 당돌한 가능성을 보고 입이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최고 점수를 주었고, 옆에 있는 면접관들은 당연히 리더를 따라 최고의 점수를 주어서, 수석합격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을 포장하여 그럴듯하게 보일 필요가 없다. 자기의 모습 그대로가 가장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서려고 할 때 사울 왕이 자기의 갑옷을 다윗에게 입혀주려 했지만 다윗은 그 옷을 입지 않고 그냥 자신이 입던 목동의 옷을 입고 나간다. 다윗은 자기의 몸을 두꺼운 갑옷으로 포장하지 않았다. 자신의 모습 그대로 골리앗 앞에 서야 물맷돌을 자연스럽게 돌릴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다윗은 일하다가 끌려온 대다수 목동의 옷을 입은 군사들의 옷차림으로 나가서 골리앗과 싸우면서 이스라엘 군사들과 소통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다윗이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은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다윗의 승리는 바로 자신들의 승리라고 여기는 소통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사울 왕의 갑옷을 찾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세상을 향해 나가라. 당신의 부족한 모습 그대로 가 세상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이 사람 베드로를 보라

나는 베드로에 대한 설교를 들을 때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설교를 즐기면서 듣는다. 이유는 한가지다. 그는 실수투성이의 열혈남아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구석도 없고, 범접할 수 없는 비범함이 있는 것도 아닌,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범인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실수를 나열하려면 지면이 부족할 것이다. 갈릴리에서 평생을 어부로 살아왔지만 자주 빈 그물만 올리는 뭔가 어설픈 어부가 베드로이다. 수제자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모습들이 많다. 분위기 파악하는 센스는 아예 가지고 있지 않은것 같다. 변화산에서 내려가야 하는데 집 짓고 머물러 있자고 말을 하는가 하면, 세족식을 할 때 몸까지 씻어 달라고 애원하기도 한다. 칭찬을 듣는가 싶다가도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이라는 말까지 들었던 베드로. 물 위를 걷는가 싶으면 이내 믿음이 없어 물속에 빠져들어 가는 그에게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죽어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베드로가 바로 매일 연속되는 우리의 삶에서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그렇지만 베드로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소통의 대가이다. 그의 부족함으로, 세상에서 부족함을 느끼고 살아가는 모든 크리스천들과 소통하고 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쓰셨다면 여러분도 쓰실 것입니다."라는 설교를 할 때 들려오는 성도들의 아멘 소리가 얼마나 큰지 모른다.

베드로가 부족한 사람이었다는 이 단순한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맞다. 분명히 부족해도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베드로를 통해 확증되었다. 우리 안에는 모두 베드로 DNA가 숨어있다. 매일 실수하고 매일 넘어지기를 반복한다. 경험도 일천하고 지식도 변변치가 않다. 상황을 판단하는 센스마저도 고장나있다. 주일마다 큰 소리로 주를 위해살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월요일만 되면 벌써 주를 모른다고 부인하며 살아간다. 주일 설교 때마다 닭 울음소리 앞에 울었던 베드로처럼 눈물로 회개하지만 몇 날이 못되어 갈릴리로 낙향하여 고기 잡는 베드로처럼 어느새 옛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다.

그러나 이런 부족함을 알고 계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 아니, 우리를 향해 말씀하신다.

"우리의 부족함의 코드를 가지고 세상의 또 다른 베드로들과 소통하라.”

고 말씀하신다.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의 부족함을 받아주고, 그들과 소통하면서 주님 앞으로 인도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가진 부족함을 방치해두지 말아야 한다. 소통의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 베드로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듯 여러분을 볼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 누군가에게 그런 베드로들이 되어야 한다.